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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의 회화나무에 남아있는 역사의 흔적

돌담* 2010. 5. 28. 10:24

 

 

'해미읍성'의 회화나무에 남아있는 역사의 흔적

 

서산에서 개발한 '아라메길'1코스의 종착지는 '해미읍성'이었습니다

 이성은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이용하여 축조된 평산성으로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습니다

성벽의 높이는 5m로 안쪽은 흙으로 채웠고.. 성벽 상부의 폭은 2.1m 정도로 통행이 가능하였습니다

동·서·남 세군데만 있는 성문은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으로 쌓았고

주 출입구인 진남문은 아치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북쪽은 문루없는 暗門)

 

이 읍성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책실. 부속사. 내아. 옥사 등이 있었으며

고종3년(1866) 병인박해 때에는 천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당했던 곳으로

천주교인을 매달아 고문하였던 회화나무와 자리갯돌 등이 남아있었습니다

 

1578년에 이순신장군이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한 적이 있으며

성의 둘레에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심어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는 이곳을

길고 긴 '아라메길'1코스를 끝내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둘러 보았습니다

 

 

 

 

'해미읍성'은 고려말기부터 그 피해가 극심했던 왜구들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1417년부터 1421년까지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이곳에 옮기고자 축성한

충청도의 전군을 관장하던 격이 높은 병마절도사영성 이었다

 

 

 

 

 

 

해미읍성의 주출입구인 '진남문' 

 

 

 

 

 

 통행이 가능한 폭 2.1m의 성벽 상부 - 성곽둘레 1,800m

 

 

 

 

 

 약 200,000㎡ (6만평) 규모의 해미읍성

 

 

 

동헌 입구

 

 

 

동헌내에는 동헌건물과 책실 그리고 동헌부속사가 있었다 

 

 

 

 

 

 

 

 

 

동헌 내부 

 

 

 

 

 

 

 

 

 

수령 300년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는 회화나무 

 

 

  

 1790~1880년에 이곳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어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있던 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였다고 하며

철사줄이 박혀있던 흔적이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터만 남아있던 옥사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복원한 옥사 ( 남.녀 옥사로 구분 )

 

 

 당시의 대표적인 무기들

좌측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 신기전기화차. 불랑기. 대포. 전자총통

 

 

해미읍성내의 민속가옥 

 

 

 

 

 

 

 

동헌건물 뒤의 넓은 공터에서 지금도 복원 공사중인 이곳 '해미읍성'은

서산시에서 '아라메길'과 함께 서산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만들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곳 이라고 합니다

이 두곳의.. 자연적인 아름다움과 역사적인 의미가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심신을 정화하고 역사 문화를 체험하는 명소로 발전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