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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윤이상의 기념관이 통영에 세워지다

돌담* 2010. 3. 27. 09:42

 

 

  작곡가 윤이상 기념관통영에 세워지다

 

 

    2010년 3월19일 윤이상 기념관이 통영에서 도천테마공원 조성과 함께 개관되었습니다

    부지면적 6,437㎡. 건축면적 1층 440㎡. 2층 354㎡ 규모로 유품 170여점이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비운의 천재''세계적인 작곡가'로 불리우는 윤이상에 대한 깊은 내용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오늘은 기념관내에 전시되어있는 게시물의 내용중 일부를 그대로 옮겨 보았습니다

 

 

 

 

 

윤이상은 아버지 윤기현과 어머니 김순달 사이에서 2남3녀 중 장남으로 1917년 충무(통영)에서 태어났다

통영은 풍부한 전통문화로 인해 많은 예술가와 시인들이 꿈꾸며 온몸으로 예술의 혼을 호흡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열세살 때에 바이올린과 기타를 배우고 연주하며 직접 선율도 써보았다

자신이 만든 선율이 동네 무성영화를 상영하던 영화관에서 연주되는 것을 듣고 작곡가로서의 첫 꿈을 품게 된다

 

 

평양 윤이상연구소가 제작해 기증한 흉상

  

에피소드 1

아버지는 종종 밤낚시를 하러 바다로 나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잠자코 배 위에 앉아 물고기가 헤엄치는 소리나 다른 어부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소위 말하는 '남도창'이라 불리는 침울한 노래인데. 수면이 그 울림을 멀리까지 전해주었습니다

바다는 공명판 같았고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습니다

 

에피소드 2

봄이 되어 논에 물을 댈 때면 개구리 천지입니다. 매일 밤 개구리 소리가 정말 시끄러웠는데

그게 나에게는 우는 소리가 아니라 예술적으로 구성된 혼성 합창처럼 들렸습니다

한 마리가 울기 시작하면 다른 소리가 거기에 맞춰 화답하고 세 마리째가 가세하면

갑자기 고음. 중음. 저음의 합창이 일제히 시작되고 또 갑자기 모두 침묵합니다

 

 

 

 1935년 아버지의 뜻으로 일본 오사카시에 있는 상업학교에 진학하였으나 음악원에서 첼로 작곡. 음악이론을 배우게 된다

이때,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되어 모여사는 지역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을 보고 사회적 정치적 의식을 갖게 되었다

1937년 통영으로 돌아왔다가 193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프랑스의 파리국립음악원에서 유학한

이케노우치 도모지로에게 대위법과 작곡을 배웠다

1941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한국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4년 일제에 체포되어 두달간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예술혼이 담긴 첼로

 

일제치하의 옥살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항활동은 계속되어 언제나 감시 대상이었고

결국 체포명령이 떨어졌는데 이것을 안 지인이 그의 도피를 도와 도망을 하게 된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도 놓지 않을 만큼 소중한 첼로는 윤이상에게 목숨과도 같은 것 이었다

대표적인 첼로곡으로는 활주(Glissees). 첼로협주곡(Konzert fur Violoncello und Orchester. 1975/76)

일곱 개의 연습곡(Sieben Etuden fur Violoncello solo. 1993) 등이 있다 

 

 

   

 광복후 고향으로 돌아와 통영의 예술인들과 함께 민족문화 창출을 목적으로 통영문화협회를 만들었다

1948년에서 1952년 사이 통영과 부산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며 작곡을 하였다

1953년 서울로 이주. 여러 대학에 출강하며 작곡과 음악이론을 가르치고 작품과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하였다

1955년 피아노 트리오와 형악 4중주 1번으로 제5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한 윤이상은

20세기 작곡기법과 음악이론을 공부하기 위해 39세의 나이로 유럽유학을 결심.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1956년 파리음악원에서 수학 후. 1957년에 서베를린 음악대학으로 옮겨 보리스 블라허. 라인하르트 슈바르츠 쉴링등을 사사했다

1959년 네델란드 빌토벤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을.. 다름슈타트에서 '일곱 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초연했다

동아시아 음악의 요소를 서양 음악에 접목시킨 그의 작품은 음악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다

1963년 북한을 방문하였고 1964년 부인과 두 자녀를 데리고 서베를린에 정착한 윤이상은

오라토리오 <오 연꽃속의 진주여. 1964> 관현악곡 <예악. 1966>의 연이은 성공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다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1968년 1969년의 2번에 걸쳐 10년이 감형되었다가

동료 음악가 교수들의 국제적 항의와 독일 정부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언제나 음악을 통해 평화를 기원했다. 정치적 상황 속에서 1971년 서독으로 귀화하였으나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의 유럽본주의장을 맡아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였다

1987년에는 삼팔선에서 남북합동음악회를 열 것을 남북정부에 건의하여

1990년 10월 서울전통음악연주단 대표 17명이 평양으로 초청받아 범민족 통일 음악회가 분단 45년 만에 열리기에 이르렀다

 

그 후. 북한에서는 1982년부터 매년 윤이상 음악제가 개최되며. 대한민국에서도 그의 음악이 해금되어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무렵 한국에서는 민주화를 외치다 스러져간 학생들이 많았는데 이에 대한 안타까움과 넋을 위로하기 위해

교향시 <화염 속의 천사 및 에필로그. 1994>를 작곡하였다

마지막 작품(1995년 작고)이 된 이 곡은 작품성과 예술성을 높이 평가 받아

독일괴테문화원이 수여하는 괴테상을 받았다

 

  

독일괴테문화원에서 수여받은 '괴테상'

 

 

 독일대통령으로 부터 수여받은 '대공로훈장'

 

 

독일 'KIEL문화상'

 

"내 음악은 나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내 음악은 우주의 큰 힘. 눈에 보이지 않는

큰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주에는 음악이 흐릅니다.

이 흐르는 음악을 내 예민한 귀를 통해 내 놓을 뿐입니다.

동양의 예술가들은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자기가 지은 작품이라고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예술이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상에서 비롯됩니다."  -  윤이상

 

 

윤이상의 유품들

 

 

 

 

 

  

 

 

 

 

 

 

 

 

 

 

 

 

 

 

 

기념관내의 작은 콘서트홀

 

 

야외공연이 가능한 음악광장 

 

 

윤이상의 생가터와 소주공장 부지를 합쳐 조성된 '도천테마공원'

 

 

윤이상의 마지막 육성

 

"나의 음악은 악을 배척하고 삶의 승리를 구가하고 슬픈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하고 인류사회에 희망을 주고자 하는 의욕이 담겨져 있습니다.

나의 고국의 형제 자매 여러분!

부디 나의 음악을 통하여 위로와 용기를 얻으시고

내가 절실히 염원하는 민족의 평화적 사회와 민족끼리의 화해가

하루 빨리 실현되기를 바라고 또 다 같이 노력합시다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