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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마지막 왕도였던 익산 왕궁리 유적지

돌담* 2009. 11. 13. 10:06

 

 

 

백제의 마지막 왕도였던 익산 왕궁리 유적지 

 

 

고도(古都)가 되려면 왕궁. 사찰. 능. 산성의 4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어야 된다고 하는데

익산은 동양최대의 사찰 미륵사. 무왕과 선화공주의 쌍릉.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 산성인 미륵산성 그리고 이곳 왕궁리 유적지가 있어

백제의 도읍지였다는 설이 유력하게 전해지는 곳이였다 

 

 

 

 

발굴 진행중인 왕궁리 유적지 전경 - 전체면적 216,862㎡ (65,600평) 사적 제408호

 

 이 유적지는 백제 무왕때인 639년에 건립하였다는 제석정사터를 비롯 그안에 관궁사. 대궁사등의 절터와

대궁(大宮)터가 남아있는것으로 알려진 토성터가 있어 이곳이 왕도였거나 왕도와 관련이 있는 유적지라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삼국사기는 왕궁성에 대하여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나

삼국유사와 일본이 전하는 중국 남북조시대 불교관련 기록인 '관세음응험기'에서는

무왕이 이곳에다 새로운 궁터를 조성하고 아예 이곳으로 도읍까지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왕궁성 남쪽과 동쪽담 일대를 정밀 발굴 조사한 결과

궁성을 축조하기 위해 대규모로 대지를 조성한 흔적과 치밀하게 축조된 성벽양식을 확인했으며

성벽축조 기법을 복원할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를 확보했다고 발표하였다

 

 

현재까지의 발굴에 근거한 유적지 전체 배치도 

 

 

왕궁리 유적은 백제 무왕때에 왕궁으로 사용되다가 그후 사찰로 변경 운영되었다고 하는데

멀리 보이는것이 국보 제289호인 5층석탑(왕궁탑) 

 

 

이 탑의 기단은 네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삼아 놓고 기둥과 기둥사이에는

길고 큰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층 쌓아 올려놓아 목조탑의 형식을 재현하고 있었다

 

지붕돌이 얇고 넓어 빗물을 받는 낙수면이 평평한 점이나 탑신부 1층의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은점등

백제 석탑의 양식을 유지하고 있고 1965년 보수작업때 기단의 구성양식과 기단 안에서 찾아낸

사리장치의 양식이 밝혀지면서 백제시대에 만들어 진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발굴 진행중인 유적지

 

 

 

 

 

 궁성을 축조하기 위해 대규모로 대지를 조성한 흔적

 

 

 발굴현장에서 나온 기와들

 

 

그리고 정원석들 

 

 

 발굴현장에서 나온 유물들과 석탑의 해체.복원과정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왕궁리 유적전시관'

 

 

석탑에서 나온 유물들은 국보 제123호로 일괄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금.유리.동등을 녹여 제품을 생산하는 '도가니'

왕궁내에는 금.유리.동등을 직접 생산하는 공방이 있어 거대한 왕궁터 였음이 드러났다  

 

 

 왕궁터 곳곳에 설치되어 있던 '배수용 토관'

 

 

 굴뚝의 상부에 장식하여 연기 배출과 비가 들어오는것의 방지와 바람에 의한 연기의 역류를 막는

화려한 모양의 '연가'와 굴뚝 몸통인 '연통'

 

 

 

 왕궁생활에 사용되었던 토기류

 

 

 현미경으로 본 정교한 금제 장신구들

 

 

 왕궁 건물에 사용되었던 무문 태극문 수막새. 연와문 수막새. 수부(首府)명 인장와. 와적기단 모형 - 좌측상부 부터 시계방향

 

 

 국내에서 최초로 확인된 삼국시대의 '대규모 공동화장실'

이 화장실은 회충.편충란등 기생충과 토양분석을 통하여 밝혀졌으며

 

 

 백제말에서 통일신라시대 2시기에 걸쳐 사용된 석축 배수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당시 화장지로 쓰였던 목부재인 굴피.상수리.밤나무가지 

 

 

 그 당시의 왕궁 생활상 모형

 

비록 왕궁터에서 발견된 주요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지만

백제의 마지막 왕도였던 이곳 익산의 왕궁리 유적지 답사는

무왕의 포부가 담긴 그당시의 역사를 엿볼수 있었던 값진 여행이었다

  

 

 

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562  왕궁리 유적전시관

063) 859-4631  http://wg.iksan.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