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대성당을 나와 점심용으로 샌드위치를 산후 카타콤바로 향하였습니다.
가는도중 만난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 가리발디 장군의 동상
카타콤바에 도착하니 입장까지 여유시간이 좀 있어 그곳 뜰에서 점심을 하였습니다.
카타콤바 라는 말은 옛로마인들이 사용했던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섞인 "카타콤바스" (구덩이 또는 동굴의 옆)
에서 유래된 말로 1세기 중엽 로마의 가난했던 사람들이 땅위에 무덤을 만들수없어 처음엔 동굴을 이용하여
무덤을 만들었스나 동굴이 거의다 차버리자 땅을 파고 지하에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네로시대를 비롯하여 기독교인들에게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신자들이 주위의 눈을 피해 로마의 성밖에서
은밀히 모이면서 그중에도 가장 안전한 장소인 아피아 가도 주변의 많은 지하무덤을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신자들의 무덤도 그안에 마련되면서 지하무덤의 면적은 점점더 늘어나기 시작하였고
2세기 들어오면서 선교의 대상이 중류.상류계층까지 확대되어 그들이 소유하고있던 땅을 희사받은 공동체는
비로서 공동체 전용묘지를 소유할수 있었스나 가난했던 공동체는 땅을 파고 지하로 내려가는 방법밖에 없어
이때부터 카타콤바의 역사가 시작된것 입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이 313년 선포되면서 장구한 세월동안 박해 받았던 교회는 땅밑에서 땅위로
올라오게 되었고 로마 전역에 흩어져있던 그리스도인의 지하 공동묘지는 모두 교회의 공적인 재산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를 얻은 신자들은 지하에 묻혀있는 성인과 순교자들의 무덤곁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묻히기 위하여 계속 그들의 무덤을 지하에 만들었스며 이일은 5세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후 네차례에 걸쳐 로마가 이민족들의 침입을 받으면서 이곳 지하무덤도 약탈을 당하였습니다.
옛 로마인들의 장례풍습은 사람이 죽으면 평소에 지녔던 모든 금붙이와 패물등을 그대로 관속에 넣어 주는데
침입한 이민족들이 이것들을 모두 약탈해 간것입니다. 이를 증명하듯 어느 지하무덤에 가더라도
관뚜껑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다 파괴되어 있는것을 볼수있습니다.
이렇게 이민족의 침입이 잦아지자 8세기 부터는 남아있던 지하의 성인과 순교자들의 유골을 로마의 성 안쪽으로
이전하기 시작하였고 성안의 기념성당으로 모두 이전되자 순교자들의 발길이 멀어지면서 이때부터 카타콤바는
역사속에서 차츰 잊혀져 가기 시작하였고 10세기에서 부터 16세기까지는 카타콤바가 완전히 잊혀진 시대였는데
17세기초 당시 고고학 분야의 대가인 안토니오 보시오의 연구에 의해 약 삼십곳의 카타콤바가 로마주변에서
발견되었고... 이번에 우리일행이 찾은곳은 그중에서도 보존상태가 제일 양호하다는 카타콤바 였습니다.
전지역 촬영금지 였습니다.
예전에는 한국인 신부님이 함께 다니면서 설명을 하셨다는데 얼마전 돌아가신후 부터는
외국인 신부님이 극히 일부분에 대한 설명만 한국말로 녹음한 라디오를 들고 우리를 안내하였습니다.
땅에 얼굴을 묻고 손가락 셋을펴 삼위일체를 드러낸 상태로 목잘린 동정 성녀 체칠리아의 시신이 있던곳
몸의 크기에 따라 무덤의 크기가 다릅니다.
사용했던 식기류들
가족무덤 - 작은것은 아기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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